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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8일] 상이군경에 대한 단상

Life/일상다반사

by 하얀잉크 2008. 12. 31.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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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의 일이다.
토요일 오후라 사람들로 붐비는 버스에서 중절모를 멋스럽게 쓰신 어르신이 타시자 한 젊은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런데 뒤 따라 들어오던 나이 지긋하신 다른 어르신이 자리를 발견하고는 휙 자리에 앉는 것이 아닌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출발하던 버스의 흔들림에 앞선 어른신이 밀리신건지 뒤따라 오던 어르신이 밀치신건지 지켜보던 나로서도 분간이 되지 않았다.

어르신이 앉으신 의자가 신형 버스인 탓에 그 앞에 선 어르신과 마주보게 되었다. 그로보터 얼마되지 않아 큰소리가 났다.
"나요? 예순다섯이요"
자리에 앉은 어르신의 목소리다. 앞에 선 중절모 어르신이 나이를 물으신 모양이다.
"난 일흔하고 하나요. 젊은이가 나를 보고 자리를 양보했는데 그 자리에 앉다니 "
"아 그래서 지금까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본거야? 그럼 말을 할 것이지 난 원래 눈이 그모양으로
생긴줄 알았네"
나이가 여섯 살 적은 어르신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뿐만아니라 어느 새 반말로 변해있었다.
"그래도 내가 한 수 위야. 난 상이군경이거든"
"상이군경이면 그래도 되는거요?"
"나이랑 관계없이 난 상이군경이라니까! 그리고 당신 어디가서 나이많다고 허세부릴 생각마"
"말 함부로 하지마쇼"
분명 오가는 말이었지만 가까이에 있는 나에게나 들릴 뿐 뒤에서는 아마 상이군경 출신의 어르신 목소리만 드릴터였다. 그만큼 중절모의 점잖은 어르신은 화를 누르며 끝내 말을 놓지 않았지만 상이군경이라는 어르신은 오히려 당당했다. 그 뒤 상스러운 욕설도 들렸다.

이 상황을 어찌할지 잠시 생각했다.
나 역시 이에는 이 눈에는 눈에 맞게 안아무인으로 덤벼볼까? 그러기엔 60대 어르신과 나와의 나이차가 너무 크다. 게다가 주변인들의 시선에도 당당하지 못하다.
일단 상종하지 않는 것이 최고다. 사실 나이만 먹는다고 어른이 되는 건 아니듯이 저런 모습을 두고 공경해야 하는 어른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모범답안은 화를 누르고 있을 어르신을 빨리 다른 자리에 앉히는 것이다. 하지만 난.. 서있고 30분째 앉고 싶어도 자리가 안날 뿐이고...

"어이"
잠잠하는가 싶더니 다시 상이군경 어르신의 목소리가 버스를 울렸다.
"젊은이가 말이야, 어른이 계속 서 있는데 양보를 해야지, 응?"
그래도 미안한 맘은 있는지 갑자기 화살을 바꾸어 자신보다 한 자리 건너 앉아 있는 젊은이에게 소리친다. 비교적 짧은머리에 젤을 바른 20대의 청년은 황당한 표정으로 일어섰다.

상이군경...
사전을 찾아보니 전투나 공무 중에 몸을 다친 군인과 경찰관을 뜻한단다.
하지만 상이군경을 앞세워 안하무인으로 덤빈 어른 한 분의 행동으로 나에게는 매우 좋지않은 이미지로 인식되고 말았다. 인격을 갖춘 상이군경을 만나기까지는 그 이미지가 쉽게 바뀌지 않을 거 같아 걱정이다. 어딜가야 맘씨 좋은 상이군경을 만날 수 있을까...

오늘의 일을 경험하며 한편으론 말리거나 편을 드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현실이, 우리가, 그리고 내가 조금 무섭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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