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鄭道傳, 1342년[4] ~ 1398년 8월 26일)은 고려 말기, 조선 초의 문신, 유학자이자 시인이며, 외교관, 정치가, 사상가, 교육자이다. 한국의 초기 성리학자의 한사람이며,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峯),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별칭은 해동장량이다.아 버지는 형부상서 염의선생 정운경이고 어머니는 우연의 딸 영천 우씨이다. 본관은 봉화(奉化)이다.
조선 건국의 일등 공신이자 최고 권력자였던 그는 조선의 이념적 바탕을 마련하고 모든 체제를 정비하여 조선왕조 500년의 기틀을 다져놓았으며, 서울시내의 전각과 거리의 이름을 직접 지었다고 한다. 제1차 요동 정벌과 제2차 요동 정벌에 반대하였으나 명나라의 횡포가 거세지자 요동을 정벌할 계획을 세워 명나라와 외교 마찰을 빚었고, 공신과 왕자들이 사적으로 보유한 사병을 혁파하려다가 갈등한다. 그뒤 신덕왕후 강씨 소생 방석 등을 세자로 추대하였으며 요동 정벌을 계획하여 명나라 태조 주원장과 갈등하던 중, 이방원이 정변을 일으킨 뒤 1398년 8월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의 군사들에게 살해되었다. 성리학이념 보급에 기여하였으며, 그는 안향-백이정-이제현의 학통을 계승한 이색의 문하생이자 정몽주, 권근의 동문으로 초기 사림인사의 한사람이었으나 정몽주, 길재의 문하생들에 의해 격하되었다.
태종은 그를 역적으로 만든 뒤 정몽주를 추상하였으며, 이후 역적의 대명사로 매도되어 오다가 고종 때 흥선대원군에 의해 복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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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3년 가을, 정도전은 유배생활 중 드디어 비장의 결심을 하고 함길도 함주에 있는 동북면도지휘사(都指揮使) 이성계(李成桂)를 찾아갔다. 한때 이성계와 함께 왜구와 여진족을 토벌하는데 함께 출정했던 정몽주로부터 그의 명성을 듣고, 외적의 침략을 물리쳐 고려의 새로운 영웅으로 떠오른 이성계를 만나기 위해 함흥으로 직접 찾아간 것이다. 그는 이성계와의 오랜 대화로 세상사를 논하다가 그와 인연을 맺었다.
정도전은 부패한 관료로 인한 피폐한 백성들을 구제하고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하는 길은 오직 혁명 밖에 대안이 없다고 결론 짓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이성계의 군사력이 절실하였던 것이다. 당시 조우에서 정도전은 이성계 휘하의 정예 군대와 일사분란한 지휘통솔에 감탄을 금치 못했고, 이성계 또한 정도전의 심오한 학문과 원대한 국가경영에 대한 경술에 감탄해 마지 않았다. 정도전은 이성계 휘하의 동북면 군사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군령을 엄하게 지킬 뿐 아니라 무기들 또한 잘 정비되어 있으며 훈련에도 열심히 임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정도전은 이성계를 훌륭하다고 칭찬하며 “이 정도의 군대라면 무슨 일인들 성공시키지 못하겠습니까?”라고 넌지시 떠보았다. 평생 전쟁터를 누벼 온 이성계가 정도전의 말뜻을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으나, 무슨 뜻이냐며 모르겠다는 듯이 반문하였다. 이에 정도전은 동남방의 왜구를 소탕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성계가 만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정도전은 재빨리 얼버무렸다.
폄하와 복권그는 이성계를 도와 고려 말에 역성혁명론을 주창하였고 조선의 건국에 기여하였으나 태종 이방원에 의해 역적으로 몰려 단죄되고 폄하되었다. 태종 이방원은 그를 폄하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정몽주를 현창하였는데, 이는 태종의 아들 세종대왕이 정몽주의 제자 권우의 문인이었고, 세조 때 사림파가 관직에 진출하면서 충절의 상징으로 성역화되었다. 동시에 정몽주의 라이벌인 그는 불이익, 폄하의 대상이 되었다.
선조 때 정여립의 난의 가담자 중 도피자의 이름을 알수 없자, 그의 이름을 삼봉이라 지어 조롱하였다. 광해군 때에 가서 허균이 그의 사상에 관심을 갖고 문집을 간행하였으나 허균은 곧 역모로 몰려 사형당한다. 그는 영조 때 가서야 영조가 그의 저서인 삼봉집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서서히 복권 여론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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