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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대자보, 안녕들 하십니까와 김예슬 선언 무엇이 달랐나?

Life/시사

by 하얀잉크 2013. 12. 17.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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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대자보, <안녕들 하십니까>와 <김예슬 선언>을 돌아보다


최근 대학가를 술렁이게 만든 한 장의 대자보. 그저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일상적인 인사말이었는데 혹자는 말문이 막히고 혹자는 눈물이 앞을 가리게 만들었다. 대자보를 붙인 주인공은 고려대 경영학과에 재학중인 주현우씨. 그는 4년동안 쌓은 스펙을 점검하고 보완해야 할 졸업반의 대학생이다.


그러고 보니 떠오르는 인물이 한 명 있다. 2010년에도 고려대 경영학과 대학생이 대자보를 붙였었다. 그땐 조금 더 강했다. 대학을 거부한다는 여학생의 당돌한 발언, <김예슬 선언>이라 불리었다. 3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대자보로 소통하는 시대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 대자보들은 대학가에 이목을 끌며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이 글에서는 <안녕들 하십니까>가 3년 전 <김예슬 선언>과 무엇이 달랐는 지 살펴보고 앞으로 어떤 과제가 놓여 있는 지 알아보고자 한다. (사실 어제 썼어야 했던 글인데 바쁜 연말 일정 탓에 하루가 늦어졌다.)





대학을 거부한 다시 보는 <김예슬 선언>


2010년 봄 기운이 스물스물 올라오고 새 학년, 새 학기의 준비로 설레이던 3월, 고대 경영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인 김예슬 씨는 자발적 퇴교를 앞두고 대자보를 붙였다. 대학을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자격증 장사 브로커'가 된 대학을 거부한다고 밝혔다. 


▶ 관련글 - 김예슬, 누가 그녀에게 돌을 던지나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 둔다. 

G세대로 '빛나거나' 88만원 세대로 '빚내거나', 

그 양극화의 틈새에서 불안한 줄타기를 하는 20대. 

그저 무언가 잘못된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는 불안과 

좌절감에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20대. 

그 20대의 한 가운데에서 

다른 길은 이것밖에 없다는 마지막 남은 믿음으로. 


이제 나의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이것은 나의 이야기이지만 나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나는 25년 동안 경주마처럼 길고 긴 트랙을 질주해왔다. 

우수한 경주마로, 함께 트랙을 질주하는 

무수한 친구들을 제치고 넘어뜨린 것을 기뻐하면서. 

나를 앞질러 달려가는 친구들 때문에 불안해하면서. 

그렇게 소위 '명문대 입학'이라는 첫 관문을 통과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더 거세게 나를 채찍질해봐도 

다리 힘이 빠지고 심장이 뛰지 않는다. 


지금 나는 멈춰 서서 이 경주 트랙을 바라보고 있다. 

저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취업'이라는 두 번째 관문을 통과시켜 줄 자격증 꾸러미가 보인다. 

너의 자격증 앞에 나의 자격증이 우월하고 

또 다른 너의 자격증 앞에 나의 자격증이 무력하고, 

그리하여 새로운 자격증을 향한 경쟁 질주가 다시 시작될 것이다. 

이제서야 나는 알아차렸다. 

내가 달리고 있는 곳이 끝이 없는 트랙임을. 

앞서 간다 해도 영원히 초원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트랙임을. 


이제 나의 적들의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이 또한 나의 적이지만 나만의 적은 아닐 것이다. 

이름만 남은 '자격증 장사 브로커'가 된 대학, 

그것이 이 시대 대학의 진실임을 마주하고 있다. 

대학은 글로벌 자본과 대기업에 가장 효율적으로 

'부품'을 공급하는 하청업체가 되어 내 이마에 바코드를 새긴다. 


국가는 다시 대학의 하청업체가 되어, 

의무교육이라는 이름으로 12년간 규격화된 인간제품을 만들어 올려 보낸다. 

기업은 더 비싼 가격표를 가진 자만이 피라미드 위쪽에 접근할 수 있도록 

온갖 새로운 자격증을 요구한다. 

이 변화 빠른 시대에 10년을 채 써먹을 수 없어 

낡아 버려지는 우리들은 또 대학원에, 유학에, 전문과정에 돌입한다. 

고비용 저수익의 악순환은 영영 끝나지 않는다. 

'세계를 무대로 너의 능력만큼 자유하리라'는 

세계화, 민주화, 개인화의 넘치는 자유의 시대는 곧 자격증의 시대가 되어버렸다. 

졸업장도 없는 인생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자격증도 없는 인생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학습된 두려움과 불안은 다시 우리를 그 앞에 무릎 꿇린다. 


생각할 틈도, 돌아볼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이 또 다른 거짓 희망이 날아든다. 

교육이 문제다, 대학이 문제다라고 말하는 생각 있는 이들조차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성공해서 세상을 바꾸는 '룰러'가 되어라”,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 나는 너를 응원한다”, 

“너희의 권리를 주장해. 짱돌이라도 들고 나서!” 

그리고 칼날처럼 덧붙여지는 한 줄, “그래도 대학은 나와야지”. 

그 결과가 무엇인지는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도. 


큰 배움도 큰 물음도 없는 '대학大學'없는 대학에서, 

나는 누구인지, 왜 사는지, 무엇이 진리인지 물을 수 없었다. 

우정도 낭만도 사제간의 믿음도 찾을 수 없었다. 

가장 순수한 시절 불의에 대한 저항도 꿈꿀 수 없었다. 

아니, 이런 건 잊은 지 오래여도 좋다. 

그런데 이 모두를 포기하고 바쳐 돌아온 결과는 정말 무엇이었는가. 

우리들 20대는 끝없는 투자 대비 수익이 나오지 않는 

'적자세대'가 되어 부모 앞에 죄송하다. 


젊은 놈이 제 손으로 자기 밥을 벌지 못해 무력하다. 

스무 살이 되어서도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모르고 꿈을 찾는 게 꿈이어서 억울하다. 

이대로 언제까지 쫓아가야 하는지 불안하기만 우리 젊음이 서글프다. 


나는 대학과 기업과 국가, 그리고 대학에서 답을 찾으라는 그들의 큰 탓을 묻는다. 

깊은 분노로. 그러나 동시에 그들의 유지자가 되었던 내 작은 탓을 묻는다. 

깊은 슬픔으로. '공부만 잘하면' 모든 것을 용서받고, 

경쟁에서 이기는 능력만을 키우며 나를 값비싼 상품으로 가공해온 

내가 체제를 떠받치고 있었음을 고백할 수 밖에 없다. 

이 시대에 가장 위악한 것 중에 하나가 졸업장 인생인 나, 나 자신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더 많이 쌓기만 하다가 내 삶이 한번 다 꽃피지도 못하고 시들어 버리기 전에. 

쓸모 있는 상품으로 '간택'되지 않고 쓸모 없는 인간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 

이제 나에게는 이것들을 가질 자유보다는 이것들로부터의 자유가 더 필요하다. 

자유의 대가로 나는 길을 잃을 것이고 도전에 부딪힐 것이고 상처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삶이기에, 삶의 목적인 삶 그 자체를 지금 바로 살기 위해 

나는 탈주하고 저항하련다. 

생각한 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행동하고, 행동한 대로 살아내겠다는 용기를 내련다. 


학비 마련을 위해 고된 노동을 하고 계신 부모님이 눈 앞을 가린다. 

'죄송합니다, 이 때를 잃어버리면 평생 나를 찾지 못하고 살 것만 같습니다.' 

많은 말들을 눈물로 삼키며 봄이 오는 하늘을 향해 깊고 크게 숨을 쉰다. 


이제 대학과 자본의 이 거대한 탑에서 내 몫의 돌멩이 하나가 빠진다. 

탑은 끄덕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작지만 균열은 시작되었다. 

동시에 대학을 버리고 진정한 大學生의 첫발을 내딛는 한 인간이 태어난다. 

이제 내가 거부한 것들과의 다음 싸움을 앞에 두고 나는 말한다. 

그래, “누가 더 강한지는 두고 볼 일이다”. 


2010년 3월 10일 김예슬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자퇴하며





<김예슬 선언>은 <안녕들 하십니까>와 무엇이 달랐을까?


사실 두 대자보는 공통적으로 88만원 세대의 아픔으로 이야기 하고 부조리한 사회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그 강도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 <안녕들 하십니까>는 그 내용이 심각하고 진중해 선언이라고까지 불리우는 <김예슬 선언>에 비해 한결 가볍다. 다루고 있는 내용이 아니라 풀어내는 방식이 가볍다는 의미이다. 


<김예슬 선언>은 그래서 결국 이런 썩어빠진 대학이라면 거부하겠다는 결론으로 끝났지만 안녕들 하십니까는 그래서 안녕하냐는 물음으로 끝맺었다. 이것이 무슨 차이일까? 개인적으로는 이것이 두 대자보의 가장 큰 차이라고 생각한다. 


<김예슬 선언>도 당시 대학가의 큰 파장을 일으켰지만 그것이 지속되지는 못했다. 김예슬 스스로 대학이라는 그라운드에서 이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두 그녀처럼 대학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글에서 대학과 자본의 이 거대한 탑에서 내 몫의 돌멩이 하나가 빠져도 끄덕 없을 것이라고 말했듯이 상아탑은 건재했다. 물론 그녀 스스로 무엇을 기대하고 계획한 것은 아니었으니 그것이 평가의 잣대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이에 반해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우리가 평소 흔히 사용하는 인삿말에는 안녕치 못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옆으로 30여 장의 화답형 대자보가 붙었고 점차 대학가로 확산됐다. <안녕들 하십니까?>에는 공감하고 참여할 수 있는 통로가 있었던 셈이다. 


물이 99도에서 100도가 되면 1도밖에 안 올랐지만 기체가 되잖아요. 그것처럼 이미 다 문제 의식이 내제되어 있는 상태였고 이야기 못하고 억눌려 있고 답답하다는 그런 심정들이 억눌린 상태에서 저는 그냥 한번 툭 하고 건드렸을 뿐인데 마른 숲에 불 붙듯이 불이 번진거죠...


주현우 씨는 한 인터뷰에서 이미 억눌리고 답답한 심정들에 자신은 그냥 한번 툭 건드렸을 뿐이라고 했다. 실제 그랬다. 안녕들 하십니까?를 심각하게 받아들인 것은 글을 읽는 쪽이었다. 무엇보다 <안녕들 하십니까?>에 날개를 달아준 것은 SNS였다. 


3년 전에도 SNS는 존재했지만 지금만큼의 파급력은 아니었던지 <김예슬 선언>은 다음 카페에 둥지를 틀었다. 하지만 3년 사이 가공할 만한 SNS 페이스북이 인터넷에 자리잡았다. <안녕들하십니까> 페이스북 페이지는 개설 첫 날 팬이 3만 명을 넘어서더니 현재 20만 명의 팬을 모았다. 전국 각 지의 대자보가 페이스북에 오르고 팬들의 SNS 타고 또 다시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안녕들 하십니까>에 바란다


그럼에도 <안녕들 하십니까?>에 노파심이 들어 바라는 것이 있다. 처음 대자보를 붙였을 때의 톤 앤 매너를 지키주길 바라는 것이다. 과거 학생운동은 21세기로 넘어오면서 두 가지 벽에 부딪쳤다. 하나는 피부에 와닿지 않는 대정부 투쟁으로 인해 학생들과 공감대가 벌어졌고 하나는 주장하는 바가 너무 무겁고 쓸데없이 진지했다는 것이다. 말투만 봐도 범접하기 힘든 투쟁 어투였다.


<안녕들 하십니까>의 울림이 컸던 이유는 앞선 것들과 다르게 신선했기 때문이다. 고등학생도 답하고 엄마세대도 답할 만큼 주제는 무거웠지만 분위기는 가벼웠다. 하지만 문제는 앞으로의 행방이다. 현재 대자보 행렬 이후 공감하는 학생들이 직접 고려대에 모이거나 오프라이 모임을 준비하는 것으로 안다. 주현우 학생이 노동당 당원이라는 소리도 들었는데 봇물처럼 터져 나온 목소리를 모이고 결집시키는데 기존 학생운동의 방식으로 접근해서는 곤란하다. 김예슬 선언이 보여주었듯이 <안녕들 하십니까>의 숙제는 일베나 종북놀음가 아니라 바로 내부에 있다.


▶ 관련글 -  고려대 대자보가 비약? 조선일보야말로 정말 안녕들 하십니까?



<사진 출처. 안녕들하십니까 페이스북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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